나는 누구인가

손 봉 호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철학이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의 세 가지라 하였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질문은 모두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귀결된다고 하였다. 한편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궁극적 목적이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무엇인지 알면 자신이 어떤 것이며 누구인지 알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과 자신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 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인간보다 한 단계 더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득한 옛날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을 둘러싼 자연 현상, 인간과 자연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생각한 신들에 대해서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

  학문의 발전 과정을 보아도, 인류가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인 것은 가까운 ‘나’가 아니라 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들이었다. 탈레스란 철학자가 천체를 연구한다고 별을 쳐다보다가 우물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있거니와, 가까이 있는 것들에 대해서보다는 ‘천체는 어떻게 운행하는가?’, ‘신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것들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사실, 그런 것에 대하여 아는 것은 역시 인간 자신일 텐데, 인간 자신에 대한 의문은 훨씬 후에 제기되었다. 희랍 철학에서는 대개 기원전 6세기에 자연 철학자들이 처음으로 우주와 자연에 대하여 의문을 품기 시작하고 철학다운 철학을 하기 시작한 반면,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 조금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약 1세기 후인 기원전 5세기의 궤변론자들에 의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 자연, 신 등에 대해서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생각을 거쳐서 가능한 것인데, 그 생각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수수께끼는 아직도 완전하게 풀리지 않았다. 물리학적으로도 모르거니와, 철학적으로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는 모든 철학자들이 동의할 수 있도록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인간이 무엇이며 인간의 지식이 어떤 것인가도 매우 중요하지만, 한 걸음 나아가서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은 한층 더 중요하다. 우리가 우주에 대해서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를 통해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가 무의미 하면 우주가 아무리 의미 있고 아름다운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것이 의미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가장 기본적인 것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인류가 왜 가장 먼 것부터 먼저 따져보기 시작했는지는 쉽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류 전체의 정신 발달 과정이 한 개인의 성장 과정과 비슷한 차례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는 다. 아주 어린 젖먹이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른다. 그래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다른 아이인 줄 알고 같이 노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적어도 사춘기가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독립된 자신의 정체(正體)를 의식하기 시작하고, 자신에 대하여 어느 정도 객관적인 인식을 하는 것은 나이가 훨씬 든 뒤에 가능하다.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지식도 없이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래서 개인의 경우를 볼 때 자신에 대한 어느 정도의 객관적 인식은 정신적 성숙도와 병행(竝行)함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생물학적 연령이 높아도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은 자신의 참 모습을 볼 줄 모른다. 인간의 눈이란 밖으로 향해져 있어서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끌은 발견하나 자기 눈에 들어 있는 들보는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바깥으로만 향해진 물리적 눈을 안쪽으로 돌리는 데는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고, 그 정신력은 많은 세월과 경험과 시행 착오(試行錯誤)를 거쳐야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나를 보듯 내가 나를 볼 수 있다면 나는 가장 성숙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가능할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누가 ‘나’를 정확하게 알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사실, ‘나’를 알기가 어려운 것은 그것이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그것은 공개되어 누구든지 관찰하고 시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나’ 자신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영역인 것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학자들은 자신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성(內省)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음의 눈으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방법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성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철학자들은 발견했다. 우선 ‘나’를 ‘내’가 살필 때, 그 살피는 ‘나’와 살펴지는 ‘나’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주체로서의 ‘나’와 대상으로서의 ‘나’ 가운데 어느 것이 진정한 ‘나’이며, 살피는 ‘나’ 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많은 철학자들은 그런 내성을 통해서는  ‘나’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술회(述懷)하였다. 영국의 철학자 흄은 그런 내성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나’는 발견되지 않고, 이제까지 자기가 경험한 것들만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스의 철학자 샤르트르도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 보아도 의식의 옹달샘 속에 들어 있는 ‘나’란 조약돌은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즉, ‘나’의 의식 속에 들어 있는 그 수 많은 경험들을 ‘나’의 경험으로 만드는 바로 그 핵으로서의 ‘나’란 내성을 통해서는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나’란 잡히지 않는 대상이다. 그것은 나의 팔에도, 다리에도, 심장에도, 머리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어디에 존재한다고 꼭 집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여기’ 혹은 ‘저기’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공간적인 것도 아니고, 우리가 초공간적(超空間的)으로 소유하고 있는 정신 현상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무엇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나’는 나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마치 내 속에 깊이 들어앉아 있는 것처럼 속을 들여다보아서는 도저히 발견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달리는 기차의 마룻바닥을 내려다보면 기차가 달리는지 정지해 있는지를 알 수 없고, 기차의 속도가 어느 정도 되는 가도 알 수 없다. 그와 비슷하게, 우리가 자신만 들여다본다 해서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인류가 자신을 살피게 된 것은 바깥 세계를 탐구한 것보다 훨씬 후대(後代)의 일이고, 개인도 상당할 정도로 성숙해야 자신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 까닭은 자신만 들여다보아서는 자신을 알 수 없고, 다만 세계와의 관계에서만 알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한 것이 철학의 시작이 아니라 철학의 궁극적 목적이라 한 것도, 다른 모든 것을 어느 정도 알아야 자신을 알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부버가 그의 책 <나와 너>에서 시적으로 표현하였거니와, ‘너’ 혹은 ‘그것’이 없이는 ‘나’가 있을 수 없다. 그는 ‘나’가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관계가 둘이 있는데, 그 하나는 ‘나’와 ‘너’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나’와 ‘그것’과의 관계라 하였다.

  그런데 이 두 관계에서 ‘나’는 동일하게 남아 있고 다만 그 상대, 즉 ‘너’와 ‘그것’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너’와 관계를 가질 때의 ‘나’는 서로 다른 ‘나’라 하였다. 이것은 ‘나’가 어떤 불변하는 실체로서 어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맺는 관계에 따라 바뀌어지는 특별한 존재임을 보여 준다.

  ‘나’의 그 두 가지 존재 방식 가운데 진정 전체적인 인격체로서의 충만한 ‘나’는 ‘너’와의 관계를 가질 때의 ‘나’라고 말 할 수 있다.

  ‘그것’과 관계를 맺을 때, 즉 돈, 집, 그 사람, 국가 등 삼인칭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과 관계를 맺는 주체는 ‘나’의 일부일 뿐이요 나의 전체는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재산을 소유했을 때, 나는 단순히 하나의 재산 소유자로서의 나 일뿐 전체로서의 나는 될 수 없다. 그런 ‘나’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과 바꿀 수 있다. 나 외에도 재산을 소유한 사람은 많고, 내가 지금 가진 재산을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재산이라는 ‘그것’과의 관계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비인격적인 관계를 맺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내가 단순히 하나의 기능인으로서 다른 사람과 어떤 일을 처리했을 때, 그 때의 나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과 대체 될 수 있으며, 그 사람은 비록 사람이지만 나에게 하나의 ‘너’가 될 수 없고, 오히려 하나의 ‘그것’으로 전락(轉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너’와의 관계에 있는 ‘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 때의 ‘나’는 인격 전체이며, 다른 무엇과 대체될 수 없는 독특한 존재이다. 물론 ‘나’와 관계를 맺는 ‘너’도 마찬가지로 그 인격 전체가 ‘나’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나’와 ‘그것’과의 관계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그 둘은 차등적 관계에 있는 반면, ‘나’와 ‘너’와의 관계는 동격(同格)의 두 독특한 존재들의 대등 관계(對等關係)다. 그 때의 ‘나’는 진정한 나다.

  가령 회사에 한 직원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회사에서 그의 상사, 부하 직원, 그리고 업무상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 때, 그는 하나의 독특한 ‘나’로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직책, 기능으로 만난다.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더라도 그 만남의 내용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좀더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어떤 사람은 좀 거칠게 일을 할지 모르나, 만남의 질(質)에는 아무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와서 대문의 초인종(招人鐘)을 눌렀을 때, 어린 딸이 두 팔을 넓게 벌리고 그의 목을 얼싸안으면서, ‘아빠!’ 하고 기쁨의 함성을 지른다 하자. 그 때 그 사람은 세상의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아버지이며, 그 때 그는 진정한 ‘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어린 딸도 그에게는 이 세상의 누구와도,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그 때의 둘은 단순히 아버지와 딸이란 기능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인격 전체를 총동원한 ‘나’들의 만남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둘이 서로 얼싸안고 볼을 비비는 순간, ‘나’가 창조된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루 종일 그 사람은 ‘나’가 아닌 회사의 과장이란 기능인으로서 활동해 왔다. 얼마든지 대체(代替)될 수 있는 부품(部品)으로 기능을 다해 왔다. 그러나 어린 딸을 만나는 순간, 그는 세상의 누구와도 대체될 수 없는 ‘나’가 되는 것이다.

  출․퇴근길에 나는 수많은 중학생을 만난다. 길이 메이도록 몰려오는 씩씩하고 똑똑한 젊은 아이들을 본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그 수많은 아이들 틈에 끼어 걸어 오는 우리 아들놈에게 끌린다. 특히 잘 생기지도 않았지만 그 수많은 아이들, 심지어 온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녀석이다. 그것은 우리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는 비록 지금 이 순간에 ‘나’, ‘너’란 말을 쓰는 상황으로 만나지 않더라도 역시 ‘나’와의 관계요 인격적인 관계다.

  사랑의 관계에서 우리는 진정한 ‘나’가 되고 다른 것과 대체될 수 없는 독특한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부부가 서로 다투다가, 남편이 “이 세상에 여자가 너뿐이냐?” 하고 고함을 친다면 이것은 살인과 다름이 없다. 그 때, 그 부인의 ‘나’는 사라지고, 다른 여자와 대체될 수 있는 ‘그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배신(背信)은 너무나 잔인하고, 배신당한 사람의 고통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은 ‘인간은 무엇인가?’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물론, ‘나’도 인간임은 분명하고 나아가서는 인간이기 때문에 ‘너’와의 관계를 맺는 ‘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하여 ‘나’를 아는 것은 아니고, 인간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이 동일한 성질의 것도 아니다.

  인간에 대한 지식은 ‘그것’에 대한 지식이고, 그것은 이론적, 객관적으로 제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객관적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원칙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지식이다. 그러나 ‘나’에 대한 지식은 ‘나’가 객관적이 될 수 없듯이 객관적일 수 없으며, 따라서 좁은 의미로 ‘지식’이 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식 이상의 것이요, 지식이 일으킬 수 없는 인격 전체가 동원된 힘과 반응을 불러일으킨다.